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문단 편집) ==== 3월~7월 ==== 1376년 3월에는 왜구가 [[진주시|진주]](晉州)로 왔는데, [[조민수(고려)|조민수]](曺敏修)가 이들과 소규모 교전을 벌여 13급을 베었다. 6월에는 임주(林州)에서 병마사 [[유실]](柳實), 지익주사(知益州事) 김밀(金密) 등이 20여척의 함선으로 침공한 왜군과 싸워 이겼으며 고성현도 노략질을 당했다. 7월에는 더욱 대담해진 왜구가 20여척의 함선으로 전라도 원수의 군영을 공격했고, [[나주]]로 이동하며 고려군의 함선을 불태웠다. 마침 이 지역을 방어해야 할 사람은 전라도 원수 겸 도순무사였던 하을지(河乙沚)였었는데, 이 하을지는 탄핵을 당했기에 이를 대신하여 유영(柳濚)[* 최영의 처조카였다.]이라는 인물이 원수로 임명된 상태였다. 설사 자리가 교체된다고 하여도 인수 교대를 할때까지는 방어 임무를 맡아야 했는데, 하을지는 진주에 있는 자기 땅으로 돌아가버려 피해가 커진 판이었다. 우왕은 하을지를 잡아다 '''곤장 백대를 때렸다.'''[* 하지만 이후 하을지는 계림원수로 복직한다. 곤장 백 대를 맞고도 원수직을 수행했다는건, 어떤 의미에선 대단하긴 하다(...).] 이후 왜구들은 현재의 [[부여군]]인 부여(扶餘)에 왔는데, 이 왜구들이 나주를 공격하고 북상한 왜구들인지 새로 등장한 왜구들인지는 불분명하나 그 기세가 상당히 강력했다. 이에 목사 김사혁(金斯革)은 정현(鼎峴)[*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 탄천면 정치리로 추정된다.]에서 왜구를 막아세웠으나, 패배하였고 공주 역시 왜구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이에 양광도 원수였던 박인계(朴仁桂)는 회덕현(懷德縣)의 서천부(徐天富)라는 자가 정현 전투를 돕기 위해 출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잡아 처형하고는 자신이 왜구를 막기 위해 나서 현재의 [[논산시]]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렇지만 박인계는 말에서 떨어져서 적에게 죽고 말았는데, 평소에 뛰어난 인물이라고 평판이 좋던 사람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